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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해독-담담당당] 유석춘

Mr. Han 2008. 11. 25. 16:46

[암호해독-담담당당] 유석춘

 

성벽의 일부를 허물어서라도 일단 목마가 성안으로 들어가면 트로이 군이 그리스군보다 우세해질 것이며, 트로이는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자 칼카스가 말했다고 전했다. 트로이 군은 대부분 시논의 말을 믿었다. 그러나 트로이의 아폴론 사제 라오콘은 트로이 군에게 목마를 불태우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라오콘이 바닷가에서 포세이돈에게 제물을 바칠 때 바다에서 두 마리의 거대한 뱀이 나와 그와 그의 두 아들을 휘감아 목졸라 죽였다. 이 광경을 지켜본 트로이 군사들은 라오콘이 반대 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에 벌받은 것으로 생각하여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오빠 헬레노스처럼 예언자 카산드라는 목마를 들이면 트로이 성은 곧 함락된다고 말했지만 아마도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아폴론이 내린 벌로 그녀의 말은 설득력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이진성, <그리스 신화의 이해> 중에서

 

(트로이의 목마가 무서운 것은

트로이의 목마를 성 안으로 들이기 위해서는 성 벽을 헐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 자금이 무서운 것은,

사실상 국가간 엠엔에이의 장벽을 허물기 때문이다.

좀더 세련된 아엠에프식 기법이 사용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난 아엠에프의 경험을 한 한국인들은  아엠에프란 단어에 경끼를 일으키니까.)

 

<시대전쟁 제36화> 인물연구; 교수 '유석춘'

 

일본은 지난 10여년의 버블시기를 잘 잡았습니다. 자국 내 부동산 버블을 빼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치열했지요. 그 과정에서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 등을 억제하면서 <엔케리>라는 괴물로 해외에서 투자인지 투기인지를 감행합니다. 사실상 제로 금리 베이스로 세상에 나온 엔케리는 <투기>에 가까웠지요. 그 알약을 넙쭉 받아 먹은 나라들이 지금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정작 일본은 지금 뭔가를 노리는 형세가 되었다는 거지요.

 

이 연재 세 번째의 인물탐구로 선정된 사람은 <유석춘> 교수입니다. 드러난 내용만으로 본다면 참으로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혜성처럼 등장해서 한나라당, 이회창 캠프, 그리고 다시 뉴라이트 본영 등으로 움직이는 일련의 흐름이 아주 눈에 띄지요. 그러나 차라리 그의 고집스런 학자적인 입장이 그 흐름에 있다고 보이는 것은 왜일는지? 나는 그의 약간은 '빗나간 우파신념'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그 가운데서는 보다 무서운 영역인 '친일'로 깊숙하게 깊숙하게 들어간 사실이 보인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인물 소개를 합니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이 자료들은 거의 대부분 공개된 영역의 자료만을 정리한 것입니다. 이것은 폄훼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에 대한 이해라는 점을 주지드리는 바 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지난 십 년, 우리 사회에서 '친일'이 어떤 형태로 우익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보기 위한 하나의 사례로 봐주면 좋겠습니다.

우익의 이름을 쓴 친일의 정체를 까발린다.

 

* 존칭을 생략함을 양지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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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일본 민단 방문 등 김진홍의 일정에 동행한 사람은 네 사람 정도였던 모양이다. 이동복, 조갑제 그리고 유석춘이다. 그가 당시 한나라당 참정치운동본부 공동본부장 자리를 내놓았던 때인지 아닌지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뉴라이트전국연합 공동대표 직은 가지고 있던 때였다.

 

유석춘. 1955년 생. 일리노이대,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다.

1995년 당시 민자당 부설 여의도 연구소 정기간행물 <정책논단> 8월호에 5월 광주항쟁을 지역감정 차원에서 접근해서 한 바탕 소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민자당 광주시 지부까지 그를 비판했으니 정도가 아주 심했던 글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는 한동안 조용했다. 재미난 것은 그 사건이 벌어지던 당시 연세대가 운영하는 일본 사사까와 재단의 기금의 변형판인 ‘아시아연구기금’ 프로그램 운영위원으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99년에는 일본 도시샤에 반 년 정도 교환교수로 다녀오기도 했다. 1995년 이후의 행적에서 그가 이렇게 일본과 관련된 행적을 보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추후 밝혀보기로 하자.

 

2000년까지 그는 시끄러운 세간에서 존재감이 없었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2001년 슬그머니 등장해서 조선, 동아, 중앙 등 칼럼을 마구 싣게 된다. 신예가 출연한 셈이었다.

 

그는 왜 그 때 ‘뜨기’ 시작했을까?

국세청 언론조사가 강력하게 시작되었다. 세 신문 모두 해당사항이 있지만 드러내놓고 자신들의 입으로 이를 마구 반박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바로 그 때, 세무조사를 언론탄압이라고 노골적으로 편들기를 해주겠다는 유석춘을 싫어할 신문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회학과 교수 신분에 소장파 특유의 날카로움을 가진 터라 오히려 반겨야 될 일이었던 셈이다.

 

2001.7.7 조선일보 시론 ‘악령들의 문화혁명’은 그가 7월 20일 이야기할 ‘홍위병’론의 전편 같은 것이었다. 언론사 세무조사 등 개혁적인 흐름 자체를 아예 ‘문화혁명’(그가 과연 문화혁명의 본질을 아는 지도 의심스럽지만)으로 규정하고 ‘때 아닌 문화혁명에 가담하고 있는 권력의 악령’들이라고 거들기에 나섰다. 이 정도 수준이니 조중동이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 시점에 그는 이미 ‘사회학’을 배운 학자가 아닌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생각은 나 혼자만의 판단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소신이라고 말하겠지만 40대 후반으로 들어가는 소장학자의 현실적 출세욕도 은근히 드러난 대목이다.

 

한겨레 신문 고명섭 기자가 쓴 당시의 칼럼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러니까 그의 주장은 현 정부와 시민단체 등이 `짜고 치는 고스톱‘을 하고 있다는 이야긴데, 이 따위 음모론을 가지고 시민단체의 도덕성을 욕보일 용기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지금 시대가 더는 물리적 폭압이 없는 시대인데다, 조중동에만 기대면 무서울 게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

 

유석춘의 아래 2001.9.11 자 조선일보 칼럼 ‘정부와 손잡은 ‘안티’ 기존 ‘정통’ 고사작전’의 한 구절을 본 끝에 나온 이야기다.

 

“이른바 ‘신문사 탈세사건’이 가장 대표적이다. 새로 정통의 자리를 차지한 ‘무슨 무슨 죽이기’니 ‘안티 어쩌고’가 먼저 나서서 이른바 개혁을 이야기 한다. 이어서 새로 정통으로 등극한 신문이 이단으로 바뀐 신문을 공격한다. 그러면 정부는 마치 마지못해 나서는 듯 슬그머니 끼어든다.”

 

내가 주목한 것은 그의 ‘친일’이 과연 돌출될 것인가 하는 점이었는데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SBS토론회에서 친일행위에 관련해서 ‘일제시대에는 다 그랬다’고 일본 대신 변명하는 것이나 조선 동아가 일본 교과서 왜곡에 비판하는 목소리가 바로 ‘과거의 친일은 친일이고 현재도 친일은 아니라는 것’으로 둘러 치거나 더 심하게는 “일제시대에 창씨개명이나 신사참배를 한 사람은 모두 대한민국 국민이 될 자격이 없다 비난할 수 있나?”라고 되묻기도 한다.

 

바로 이 부분이다. 2001년 시점, 유석춘은 과연 어디에서 이러한 일본 극우의 논리로 ‘친일’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을까? 그가 단순히 조중동의 세무조사를 감싸기 위해서 친일이 무슨 죄인가 라고 들먹인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일련의 칼럼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는 분명히 친일과 반북을 대립적 관점에 놓고 친북보다는 친일이 낫다는 논리를 열심히 펴는 중이었다. 당연히 거기에는 일제강점을 더 따지지 말자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었다.

연세춘추 제1416호(2001.5.7) ‘조선일보’ 반대운동에 대한 찬반에서 유석춘은 반대입장을 들며 이렇게 설명을 한다.

 

“ 조선일보의 논조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조선일보에 글을 쓰지도 않고 또 구독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권유하기로 했단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을 하는 까닭은 조선일보의 논조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극우’이기 때문이란다. 이런 일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진보’세력이라고 부르고 있다.(중략) 이른바 ‘진보’를 내세우는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현실적인 영향력에서 조선일보가 차지하는 위상은 감히 ‘진보’세력이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수준이다. 이 부분은 ‘진보’세력 스스로도 자인하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국민 전체의 기준에서 볼 때 이른바 ‘진보’가 주장하는 내용보다는 조선일보와 같은 ‘극우’가 주장하는 내용이 보다 많이 수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신문은 신문끼리 경쟁해야 한다. 법관은 판결문으로 말하고, 신문은 기사로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는 독자와 국민의 몫이다. 제발 떼거지로 몰려다니며 조선일보가 나쁘다고 설득하려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제 우리가 당신들에게 조선일보가 좋은 신문인지 나쁜 신문인지 물어봤냐고요.’”

 

이 글이 바로 유석춘의 2000년 이후 오늘까지를 모두 보여준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전형적인 ‘기득권 신봉주의자’이다. 달리 표현하면 ‘출세주의자’이고, 나아가 그 스스로 ‘강한 자를 따른다’는 논리를 형성한 사람이다.

 

그에게 일본은 어떤 존재인가?

뉴라이트 집단의 특성은 ‘일본에게 배워야 한다’는 기본 약세로부터 출발한다. 한국 사회 내부의 문제가 돌출되어 그 가운데 일제로부터 얻어진 기득권을 문제 삼는 순간, 그들은 ‘그것도 능력’이라고 말하는 습관이 있다.

 

그의 정치 행보가 이어지기 바로 직전, 사사까와 재단으로부터 연세대로 공여된 자금인 ‘아시아연구기금’의 사무총장이 된다. 그가 일한 기간은 2004.7~2006.10이다. 이 기간을 잘 기억해두고 아래를 보자.

 

2005.11 유석춘은 뉴라이트전국연합의 상임대표가 된다. 그가 이 자리를 차지하고 난 직후 프리존 뉴스 편집장 강길모와의 인터뷰가 있었다. 그는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뱉어 놓았다. 쭉 내용만 훑어 보기로 하자. 군데군데 요약 발췌해서 싣는다. 2006.1.9 자였다.

 

“사학법 개정안은 철회되어야 한다. 평준화 정책은 근본적 재검토가 되어야 한다.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이 사학법 개정안을 놓고 전교조의 사학장악음모라는 등의 이념문제로 보는 것은 박근혜 대표의 음모론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원희룡 쪽에 ‘병’이 있는 것이다. 자기가 싫으면 떠나라. 대학은 이제 탈이념화, 우경화된 상황이다. 뉴라이트 학생회가 더 많이 결성되어야 한다. 좌파도 두 종류다. 민주주의 절차를 따르는 좌파와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는 좌파가 있다 절차를 존중하는 좌파는 우리나라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 뉴라이트 전국연합은 시민단체로 남을 것이다. 개인적 차원의 이탈은 어쩔 수 없는 문제다. 친북좌파가 바로 영구분단 세력이다. 경우에 따라 북진통일의 가능성까지 열어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아픔을 철저하게 공유하는 같은 민족이라면 언제나 소극적 방어적 수준에 그칠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통일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소 과격하지만 그런 식 입장도 무조건 배제하지 못한다. 제도권에서는 김문수의원, 현재 우파 진영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신지호 교수님 같은 분들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리더십으로 충분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유한 분으로 생각한다. 원희룡, 남경필은 소장이라기 보다는 노회한 정치인 느낌이 든다.”

 

그는 자신을 ‘애국우파’로 정의했다. ‘신지호’가 등장한 것은 자연스런 흐름이다. ‘친일’이 역시 ‘반북’보다는 훨씬 앞선 개념이라는 생각을 그렇게 표출했다고 보여진다.

 

이력은 이어진다. 2006.9 뉴라이트전국연합 공동대표직과 함께 그는 한나라당 참정치운동본부 공동본부장이란 자리를 꿰차게 된다. 현실정치로 들어간 셈이었다. 그 사이 한나라당 내부에서 그의 입지는 매우 좋지 않은 듯했다. 원희룡은 노골적으로 “일부 뉴라이트 세력들이 극단적으로 수구적 언행과 메카시즘으로 당직자를 모욕한다. 색깔론으로 중도개혁 세력을 쫓아내려 한다”고 비판했다. 유석춘이 그 대상이 된 것은 분명하다.

 

바로 2006.11.14 경향신문에서 있었던 유석춘, 원희룡, 신지호 간, ‘최열’을 둘러싼 논쟁이 그 시발점이기도 했다. 그가 칭찬했던 신지호와도 쟁론이 생겼던 대목이다. 세간에는 ‘안중근=테러리스트’로 잘 알려진 발언이다. 그 대화를 옮겨 본다.

 

신지호= 최열씨는 주사파가 아니다. ‘최열이 친북좌파니까 오세훈 너도?’ 이런 식의 접근은 뉴라이트에 맞지 않다.

유석춘=최열씨가 왜 친북좌파가 아니냐. 최열씨가 부안사태를 일으켰다. 부안에 환경운동연합이 들어가 무법천지로 만들지 않았나. 이 사건과 북한핵을 연결시켜 생각해보자. 최열과 환경운동연합은 남한이 평화적으로 사용한 핵에 대한 방사능 처리시설도 못 짓게 하는 사람들인데, 그렇다면 북한 핵실험에 대해 더 심각하게 대응해야 하지 않나. 38선 넘어 화염병이라도 던져야 하지 않나. 나도 반공주의자는 아니다. 유럽의 좌파 같은게 나와 경쟁했으면 좋겠는데 왜 우리나라엔 북한 편드는 좌파 밖에 없나. 좌파, 진보가 우리보고 극우, 수구라고 하던데 극우는 테러하는   안중근같은 사람이지, 난 연필 하나도 못 던진다.

 

도시락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와 총으로 이토오 히로부미를 격살한 안중근 의사도 구분하지 못했다. 그의 역사지식 부재인가? 아니면 역사인식의 한계인가?

 

2007.6~8 기간 그는 한나라당 18대 대통령 후보경선관리위원이 된다. 그러니까 김진홍과의 일본 도쿄여행은 한나라당에서 경선관리위원이 될 즈음으로 짐작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경선에서 이명박이 대통령 후보가 되고, 박근혜가 떨어진다. 그는 누구를 후원했던 것일까?

 

2007.11.27 대통령선거를 얼마 앞두고 그는 백지연의 SBS전망대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이미 이명박에 대한 기대를 그는 버리고 있었다.

 

“이장춘 전 싱가폴 대사가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로부터 직접 받았다며 공개한 BBK명함이 이회창 무소속 대선후보 지지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중도라는 기회주의에 편입된 한나라당은 변절되었다. (이회창 쪽으로 가는 것은) 보수의 분열이 아니라 확대다. (박근혜가 옳은가에 대해) 링 위에 못올라가서 언급할 이유가 없다. MB와 비교, 박근혜가 지난 경선에 내걸었던 정책이 조금 맞는다고 본다.”

 

2007.11.29 CBS 시사자키 신율과의 대담에서는 “이회창-박근혜 간 연대 가능하다고 본다”고도 했다. 그에게 이명박은 더 이상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었을까?

그는 이회창에게로 달려간다. 정책특보를 했고, 선거에 졌다. 그리고 창당 과정에서 자유선진당의 정책조정위원장이 되었다. 그가 참여함으로써 자유선진당도 사실상 ‘뉴라이트’ 깃발이 꼽힌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한나라당-자유선진당은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지 않은 정치 세력간 다툼일 뿐이니 구분법도 의미는 없다. 그는 2008년 초 자유선진당의 70~80석 쟁취 가능성도 언급했다.

2008.8.25 그의 웹사이트에는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경선관리위원까지 이외는 이력이 올라와 있지 않다.

 

2008.7.17 제헌절 60회에 이화장에서 100여명의 보수우파 지식인이라며 모여 ‘미래연구원’ 출범을 선포했다. 연구과제로 1차년도 ‘국가정통성 확립과 통일외교전략’, 2차년도 ‘번영국가전략과 교육과학기술정책’, 3차년도 ‘문명국가와 사회문화정책’이 내걸렸고, 연구과제 수행원으로 유석춘의 이름이 올라갔다. 이 모임은 뉴라이트 지식인의 씽크탱크 부활로 보도되었다. 그 이전 7.14 정부가 국무총리실 주재로 건국 60주년 기념으로 하는 60일 연속강연에도 그의 이름은 들어갔다. 여전히 그는 뉴라이트 이론가로 그 행적을 남기고 있다.

 

유석춘의 2000년 이후 정치이력은 폴리페서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직 그를 ‘친일의 사냥개’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지 않는 것은 그가 소위 자신을 ‘애국우파’로 정의하면서 일본의 우파-극우와의 연동성을 명확히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정쩡한 대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일련의 행위, 발언, 그리고 족적은 의심할 바 없이 그를 일본기획자의 하수인이라 확정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는 이른바 ‘자발적 애국우파 확신범 형(型) 친일매국자’라고 불러도 표현에 덜함은 없을 것이다.

 

그는 아직도 ‘신지호’를 차세대 유망 정치리더로 볼까? 그게 궁금하다

 

 

 

(결론:자발적 애국우파 확신범 형(型) 친일매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