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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해독-담담당당] 왜색이 위험한 이유

Mr. Han 2008. 11. 25. 16:48

[암호해독-담담당당] 왜색이 위험한 이유

 

* 쌀을 뿌려주는 것도 죄가 되구나. 닭들이 서로 다투니 (이싸)

 

* 가을 달빛 속에 벌레 한 마리 소리없이 밤을 갉아 먹는다. (바쇼)

 

- 일본의 <하이쿠(俳句)> 중에서

 

<시대전쟁 제39화> '오늘의 왜색(倭色)'은 왜 위험한가?

 

나는 평화주의자입니다. 평화롭게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나는 평화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의도, 그러니까 '침탈'(侵奪)이란 개념을 설정하는 상대에게는 단호합니다. 그것은 회피할 수 없는 '전선'이 형성되는 것이니까요.

나는 평화를 원하지만,

상대가 원치 않으면, 혼자만의 평화는 존재할 수 없다.

 

개성공단에서 사건은 벌어지기 시작하는군요. 좋지 않습니다. '흡수통일'의 의지를 공공연히 밝히면서 격장지계가 완성된 것인지 어떤 지, 저런 방식이면 한국 사회는 다시 '문제의 본질'을 잃고 엉뚱한 가지에 휘둘리게 될 공산이 커진다는 생각도 드는 것입니다. 이런 형태로 경제를 살리는데 집중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될 지경입니다. 불안이 상존하는 땅의 경제, 불안정 속의 출렁임에서 어떻게 안정을 가져오려고 하는 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떤 이의 댓글 가운데 두 구절이 쑤욱 눈에 들어오는군요.

개성공단 말아먹고, 흡수통일 시도하면,

전쟁이라도 하겠단 거냐?

sbs 지나간 다큐 각자 찾아보도록.

 

"매국노던 친일파가 별거더냐. 일본 좋은 일 하는 넘이 매국노고 친일파지."(히...혼님)

 

신중하게 도대체 <오늘의 일본>이 어떤 자리에 있는가를 설명 가능한 자료를 찾아봅니다. 조금 강도가 낮기는 하지만...전체를 뜯어볼 수 있는 것을 아래 준비해봅니다.

 

일본이 침탈의 역사를 잊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지금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경제침탈>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전쟁이 가능한 상태이며...정신적으로도 그들은 이것을 <찬스>로 여긴다는 점에서 각성이 필요하지요. 물론 일본에도 말하고 싶습니다. "진정한 평화를 위한다면 여기서 멈춰라." 그러나 나의 말을 들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들에겐 그들의 길이...이 가을로부터 겨울로 가서 해야할 일이 있다고 믿는 구석이 곳곳에서 냄새를 풍기지요.

 

간단하지만...일본의 '흐름'과 역사적인 것, 문화적인 것을 동시에 볼 수 있는...그러면서도 좀 '짧은' 글을 찾아보았습니다. 지난 8월 정리해둔 것 가운데 한 토막을 게재합니다. 본래 의도한 자는 감추려고 하기 마련이지요만, 지금은 의도를 감출 기색도 보이지 않습니다. 일본의 '혼네'를 찾아보는 작업도 그래서인지 별로 어렵지가 않군요. '일본을 이끄는 주도세력'과 '일본'은 다르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체로 보통의 일본인의 경우에는 이런 '기획과 의도'를 알기란 쉽지 않은 점도 있더군요. 그래서 우리가 일본의 겉은 대개 본다고 하지만...그 속내보기가 어려운지도 모릅니다.

 

아래의 글이 내용에서 부족하다면...다른 글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왜색'...참 무서운 바이러스처럼 우리 시대를 '갉아 먹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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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型), 다테마에(建前), 왜색(倭色)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틀

 

‘왜색’(倭色)은 왜 위험한가?

 

우선 이 단어부터가 관건이 된다. 역사적 반감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그보다 이 말의 의미는 훨씬 포괄적이다. 우리는 무엇을 왜색이라 정의 하는가?

 

문화상대주의 측면에서 보면 일본은 당연히 그들 식의 특질을 가지고 있다. 그들만의 고유한 체계 같은 것이다. 굳이 그런 왜색문화에 대한 콤플렉스를 말할 필요는 없다. 그건 일정 수준 교류와 보완이 되면서 우열을 가리게 되는 것이니까.

 

‘왜색 짙다’, ‘지극히 일본적이다’라는 용어로 상대를 단숨에 왜색이란 단어로 포획해버리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왜색이 있다는 사실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걸 못 보아서 바로 이런 사태가 오고 있는 것이니까.

 

어떤 이는 이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실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이를 따라야만 하는 현실주의적 일본인’이 만들어낸 색채라고 표현했다. 즉, 가타(型)를 극히 중요시한다는 뜻이다. 고토(琴)나 사미센(三味線)의 전통음악, 스모, 다도(茶道), 엄격한 서간문이나 고전문학 속의 형식주의 등에서 발견되는 ‘틀’의 문화다. 여기에서는 철저하게 ‘다테마에’(建前)의 세계, 그 발현을 볼 수 있다.

 왜색=형식주의: 모양을 중요시 하는 것.

(예를 들어 조선 칼하고, 일본도를 비교해 보자.

일본도는 모양이 아주 끝내주게 이뻐.

거기다가 얼굴까지 비치게 거울처럼'경면연마'라는 것도 한다.

물론 일제 물건들이 외형을 이쁘게 만드는대 치중하는 것도 마찬가지.

근대 조선칼은 어때? 잘 짤라지면 되는거지 뭐 그걸 가지고 거울처럼 광까지 낼꺼 있어?

이런 정신상의 차이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거다.-역자주)

 

나카네 지에처럼 이를 사회인류학적으로‘장(場)’에 의한 집단의 형성, 평등주의, 동류와의 경쟁, 감정이 우선하는 세계의 형성 등이 (일본사회의)‘단일성’(單一性)을 전제로 수긍된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곽창권은 그의 1999년 저서 ‘신일본책략’(도서출판 창암)에서 왜색문화를 계급사회, 청백리 개념이 없다는 말로 축약하기도 한다. 종합해보면 왜색문화는 사람과 사람,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에서 나타나는 특질이 역사성과 결합해서 보이는 현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왜색2=집단주의

(계들은 혼자는 뭐가 안돼. 뭐 유치원 애들 또래집단처럼 ,

집단으로 모여야 안심이 되는 심리야.

근대 한국은 그런가?

집단을 이루면 뭐가 안 돼잖아? 그중에 잘난넘이 너무 많아서 꼭 깨지고.

배가 산으로 간다 이거야. 근대 혼자하면 기똥차.

근본적으로 한국사람들은

유태인처럼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서 두목이 되어야 하는 국민성을 가졌어.

그래서 유태인놈들이 젤 무서워하는게 한국인이야.

그래서 한반도에 가둬 놓고 싶어하는거고.

그래서 미네르바가 외국어 배워서 외국 나가라고 한거야.

박진영도 그랬지? 가수 비 키운애.

"한국사람 외국나가면 진짜 성공합니다. 한국사람처럼 끈질기게 노력하는 사람들 없어요."-역자주)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정형(定型)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 그것이 바로 일왕가와 그를 둘러싼 조직과 개인, 관계들에서 모두 드러난다고 나는 본다.

 

실제 한국 사회에 왜색종교인 창가학회가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케다 다이사쿠는 형식적으로는 신도회 회장(지금은 명예회장)일 뿐이지만 그들 내부에서는 매우 존엄한 ‘스승’이며, 거의 절대자 취급을 받는다. 어떻게 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을까? 창가학회의 특징은 사제를 제거하고 의례를 편의주의로 간소화 하는 등 특별히 종교활동을 하는 느낌을 주지 않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 집단 속에서는 분명 왜색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런 모습도 바로 왜색의 다양성에 해당한다.

한국의 창가학회는 왜놈종교다.

한국사람을 왜색으로 물들이려고 들여온거다.

즉, 한국사람을 일본놈들처럼 집단에 순응해서 다스리기 쉽게 만들려고.

한국놈들은 고분고분한 맛이 없거든. 일본놈들 처럼.

 

하나의 국가 민족이 가지는 색깔은 개인과 사회, 집단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일시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누적되어 만들어지는 현상이다. 단순하지가 않다.

 

일본은 일단 세 가지 관점에서 들여다 보지 않고서는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첫째가 바로 ‘혼네’(本音)다. 그걸 파악하지 않고 카타(型)인 다테마에(建前)는 본질이나 표상 모두 거짓에 가깝다. 즉, 현실이긴 하지만 눈에 보이거나 않거나 ‘참’이 아니다.

 (혼네와 다테마에. 중요한 거 나온다.

일본 국민성 말할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야기다.

혼네는 진짜 속마음이고

다테마에는 겉으로 보여주는 얼굴이다.

이렇게 된 대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섬나라에서 도망갈 곳도 없는 일종의 감옥같은 곳에서

칼든 무사들이 정치를 하면, 옳든 그르는 일단' 예예' 해야 살아남는다.

보복을 나중에 하더라도 내가 살아남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일본인들은 이게 발달했다.

겉 다르고 속 다르고,

얼마나 자기 속을 잘 감출수 있냐는 것이 칭송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영어로 하면 얼마나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 나라 한국에도 이런 국민성 가진 친구들이 좀 있는대

난 이해한다.

조상 대대로 탐관오리들한태 치이면 이렇게 안 될 수가 없다.

짱도 한 40년 당하니까 슬슬 그렇게 되어 가는 자신을 느낀다.

 

지금 한국이 그상황이잖아. 완전 섬. 삼팔선 갈라놓고, 남쪽애들은 완전 섬나라 일본하고 같은 상황이다.

예전같으면 만주로 도망가서 개타고 독립군이라도 하겠지만.-역자주)

 

둘째, 논리(論理)다. 이건 철학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이를테면 친한파라고 불리는 과거 제국주의 추종자, 극우나 우파들이 가진 일제강점 당위론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망언’이 아니라 논리를 가진다. 그런데 펼치는 논리에서 상대를 기본으로 하기 보다는 자신이 속한 단일사회의 틀을 먼저 고려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건 논리가 아니라 목적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경향이 높다.

진심을 말하면 죽는거야. 전쟁의 세계에선 말야.

 

셋째, 틀(場)이다. 자신이 속한 가치관이나 생활의 틀이 어디이며 무엇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하는 일차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소속감이다. 이것은 때로 소우주를 자신의 대우주로 착각하게 만들고, 다시 그것으로 자신과 일, 집단, 사회와 국가를 평가까지 하게 만든다. 상대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과연 ‘궁내청’이라는 조직이 가진 한반도와 관련된 실체는 무엇일까? 거꾸로 거슬러서 보자.

 

일왕가의 집행자라는 신분적인 틀(場)로부터 들여다 보면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그들에게 일왕은 분명한 삼각형의 꼭지점으로 존재한다. 일왕가가 있어 그들은 존재의미를 부여 받는다. 거꾸로 그들이 있어 일왕가도 존재한다. 형식적으로는 주종(主從)의 관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보호자이다. 무엇을 보호하는가? 일왕가의 역사와 지위를 지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일본이라는 사회 국가를 견지(堅持)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들의 틀이다.

 

논리로 접어들면 간단한 형식이 나타난다. 바로 ‘카타(型)’인데 마치 샤미센의 연주처럼 그들의 행동은 의례적이고 격식이 맞추어져 있다. 존엄(尊嚴)의 수호라는 논리는 모든 기타의 논리들의 상위에 있다. 그것이 깨어지면 그들이 다테마에를 발현해야 할 당위가 사라진다. 그 속에 역사성도 현재 일본이란 국가의 법도 있다. 그러니까 법보다도 사실상 이것(型)이 우선된다고 봐야 옳다.

(형식이 발달하는 이유가 뭐냐면, 진짜 속마음은 저새~끼를 처 죽이고 싶어.

근대 힘이 없어. 그러니깐 형식적으로라도' 예예' 해야되.

킬빌에서, 우마써먼이 칼부림 하던 일본 술집 주인 생각해 봐.

리우 인가 하는 중국계 여배우가 일본 야쿠자 두목 역으로 나올 때,

연방 굽실 거리면서, 그게 바로 발달한 형식이란 거다.

형식적으로 굽실거린단 거지.

속 마음(혼네) 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역자주)

마지막으로 ‘혼네’다. 바로 생존체계의 유지다. 살기 위해서 선택 가능한 모든 방법을 실행한다. 이것이 그들 조직의 철학이며 논리를 포함하여 압축된 단어다.

 

한국에 대한 왜색의 전파는 단순한 문화논리 수준에서 이야기할 수 없다. 그것은 일왕가가 가진 필연성과 목적성이 동반되어 있다. 그러므로 일본이라는 문화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가장 정형이 된 모델인 일왕가의 틀이 한국에까지 그대로 정착되어 가는 것을 ‘기획’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한국의 개신교(기독교)는 신사(神社)를 통해 전파되는 신도(神道)와 경쟁을 할 대상도 아니며, 정권이나 정부, 또는 어떤 지위나 소속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일왕가와는 경합(競合)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판단이 중심이 된다. 중요한 것은 그들 개개인이 아니라 한국 사회 국가 내부의 집단을 어떻게 일본에 맞는 정형화를 할 것인가로 모아진다. 그것이 바로 이른바 ‘왜색의 안정화’라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인들의 국민성을 일본사람들과 비스므리 하게 만들기 위해

창가학회도 들여오고, 기독교도 이용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서 일본 내의 모든 일왕가를 떠받치며 그에 동조하는 동일주의자들은 모두 자기네들의 활용 대상이 된다. 최종적인 목표는 오래 전부터 정해져 있다. 일왕가가 좁은 섬나라가 아니라 대륙에 그 뿌리를 연결하는 것이다. ‘125대 천황’이라는 명맥에서 모리 요시로처럼 ‘일본이 신의 나라’라고 믿는 가운데서 궁내청은 그들이 취할 뚜렷한 입장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 그러기 위한 모든 행위는 정당성이 부여된다.

 

‘사냥개’는 이러한 일을 위한 도구다. 주구(走狗)인 셈이다. 이들은 ‘일왕가의 덕’(德)으로 표현되는 그들 꼭지점의 우수성과 존엄을 주변에 전파하고 그 영역(틀, 場) 속으로 끌어 들이는 역할이 부여되어 있다. 이것은 지극히 단순한 배역이다.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지원은 궁내청의 몫이 아니라 사냥개에 맞게끔 적절하게 다른 종적 하부에서 지원되고 후원되기만 하면 된다.

사냥개들이 하는게 바로 이거야.

그러니 통일을 원하겠니? 한국을 섬으로 만들어야 섬나라 인간이 되지. 

 

그들은 일종의 ‘눈에 보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것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낸’ 구도를 집행한다. 현실적인 모형과 도식을 만드는 것, 그 체계를 잡는 것이 바로 그곳이란 점에서 나는 이들을 일본기획자로 지목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바로 비판하기에 따라서 ‘왜’(倭)라고 불려야 하는 소우주적인 콤플렉스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이 한국 사회 국가의 오늘에서는 매우 강력하게 작용을 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정밀함이 일단 무기가 되었기 때문이고, 한국 사회에서 이 ‘왜색’의 냄새를 못 맡았던 결정적 누실(漏失)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건 결함(缺陷)에 속하고 한편으로는 한국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로 이러한 바이러스에 무방비 했던, 파급효과가 큰 전염성을 간과했던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안일함도 한 몫을 했다.

이게 아주 정교한 방식으로 들어오고 있어서

냄비 속 개구리들이 눈치르 못채고 있다.

난 그걸 알리려고 나선'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불과하다. 

 

이것은 단순히 한국 내에서 ‘친일’이라는 이름의 재구성 행위만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란 점에서 나는 ‘침탈’(侵奪)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다시 백 년’은 가상의 개념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눈 앞에 다가오는 시점을 둔 전쟁이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접근법에는 그들(일본, 일본사회와 궁내청 등)을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단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가 그간 국가철학이건 혹은 문화논리 등에서 이를 방어하는 데 취약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