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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新種) ‘바지세우기’

Mr. Han 2009. 4. 10. 09:41

신종(新種) ‘바지세우기’

 

 
일반적으로 경매입찰 시 바지를 세운다고 함은 최고가매수인(1등 입찰자)의 입찰가를 떠받치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최고가매수인외 가장(假裝)의 입찰자(속칭 ‘바지’라고 함)를 내세우는 것을 말한다.
‘바지’를 세우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입찰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부연하면 이렇다. 경매입찰을 대리하는 컨설턴트가 아무리 경험이 많은 전문가라고 해도 경매물건에 따라 또는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입찰가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입찰가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는다는 것은 곧 경쟁 입찰자가 몇 명일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예상 경쟁 입찰자에 대한 파악은 입찰가 산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잣대가 된다. 따라서 예상 입찰자가 정확하게 파악되는 경우에는 이에 맞춰 입찰 전에 고려했던 입찰가 범위내에서 입찰가를 적절하게 조율하여 입찰할 수 있게 된다.

반면 예상 입찰자가 파악되지 않는 경우에는 여러 사람이 입찰할 걸로 예상하고 최저매각가보다 상당히 높은 가격에 입찰하여 낙찰됐으나 결과적으로 단독으로 입찰하였거나 이와는 반대로 다른 입찰자가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입찰가를 최저매각가 수준에서 낮게 써 냈는데 결과적으로 십수명이 입찰 들어와 낙방하게 되는 등의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후자의 경우에는 떨어진 것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고 의뢰인에게 새로운 투자물건을 소개해주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전자의 경우는 낙찰이 되고도 뒷맛이 씁쓸하고 의뢰인(낙찰자)에게서 쏟아지는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역경에 처할 수밖에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낙찰을 받아주고도 수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을 피하기 위해 ‘바지’를 세우게 된다. 단독 입찰을 예상하였든 경쟁 입찰을 예상하였든 고가로 낙찰되는 것에 대한 의뢰인(입찰자)의 비난을 피하기 위한 컨설턴트의 고육지책에서 나온 눈속임인 셈이다.

그간 ‘바지세우기’는 가장(假裝)의 경쟁률을 높여 낙찰자로 하여금 결코 높은 가격에 낙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 악용돼 왔지만 최근에는 이와 반대로 최고가매수인을 떠받치는 것이 아니라 최고가매수인이 ‘바지’로 나서는 새로운 형태의 ‘바지세우기’가 종종 나타나고 있다. 그 새로운 형태의 ‘바지세우기’가 어떤 것인지 사례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지난 3월 10일, 주춤했던 경매시장이 살아난다고 해서 취재차 모 일간신문 기자와 동행하여 서초동 중앙지방법원의 경매법정을 찾은 적이 있다. 이날 경매법정을 찾은 인파는 대략 300명 정도. 경매1,6계 담당의 총 85건이 경매에 부쳐져 26건 정도만 낙찰(낙찰률 30.6%)됐고, 경쟁 입찰자도 많아야 14명을 넘지 않아 아직 실매수세가 완연히 살아났다고는 느낄 수는 없었지만 부동산시장 침체 여파로 경매시장마저 꽁꽁 얼어붙었던 지난해 10월에 똑같은 목적으로 찾았던 경매법정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날도 입찰실수 사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입찰시간에 임박하여 법정에 도착한 입찰자가 부랴부랴 입찰에 응하기 위해 입찰표를 교부받으려고 했지만 거부당한 사례, 경매기일이 변경된 사실을 모르고 입찰한 사례, 대리 입찰하였음에도 본인의 인감증명서를 첨부하지 않아 입찰이 무효로 된 사례 등등..,

그런데 이날 입찰이 무효로 처리된 사례 중 유독 눈에 띄는 사례가 하나 있었다. 동작구 신대방동에 소재한 동작상떼빌 오피스텔 35평형(감정가 3억7천만원)이 그것. 각각 2차례의 유찰과 변경을 거쳐 2억3680만원에 경매에 부쳐진 이 물건은 당초 6명이 경쟁 입찰하여 2억8030만원을 써낸 ‘K’씨가 최고가매수신고인으로 선정됐다.

그러나 ‘K’씨의 입찰은 이내 무효 처리되었다. 입찰표상의 입찰가액을 수정한 채로 입찰하였기 때문이다. 수정한 것도 모자라 입찰가액에 두 줄을 긋고 날인까지 했다. 입찰가액 수정은 입찰무효사유에 해당한다. 당연히 ‘K’씨의 입찰은 무효가 되고 2억5220만원을 써낸 2등 입찰자인 ’Y'씨가 낙찰자로 선정됐다. 1등 입찰자보다 약 3천만원이 적은 금액에 낙찰되는 행운을 거머쥔 것이다.

입찰가액 수정에 의한 입찰무효는 종종 발생하는 사례이기에 뭐 그리 대수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이날 무효 처리된 입찰자가 한마디의 항변도 없이 너무나 당연하듯 그 결과를 받아들였다는 점, 입찰 전 집행관이 입찰 시 주의사항을 구두(口頭)로 고지하면서 입찰가액을 수정한 채로 입찰표를 제출하면 입찰이 무효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는 점으로 보아서도 일말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무효사유에 해당하는 입찰(서류미비, 보증금 미달, 입찰가액 수정 등)로 입찰이 무효가 되면 차순위 입찰자가 최고가매수인이 된다는 점을 이용한 다른 형태의 ‘바지세우기’인 셈이다.

그간의 ‘바지세우기’가 낙찰은 물론 낙찰가와 최저매각가와의 차이를 좁히는데 목적이 있다면 이 같은 신종(新種) ‘바지세우기’는 낙찰이라는 목표는 같지만 가급적 저렴한 가격에 낙찰을 받기 위한 계산이 깔려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또한 그간의 ‘바지세우기’는 1등 입찰자가 최고가매수인임은 염두에 둔 것이지만, 신종 ‘바지세우기’의 최고가매수인은 1등 입찰자가 아니라 2등 입찰자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입찰법정에서 숱한 입찰실수들이 발생하고 있지만 그 실수들 역시 단순한 실수로 치부하기에는 다소 미심쩍은 이유, 바로 갖가지 형태의 ‘바지세우기’가 관행적으로 횡행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입찰 실수, 특히 서류미비, 보증금 미달, 입찰가액 수정에 의한 입찰 무효가 입찰자의 단순 실수에 의한 것인지, 아님 컨설턴트의 다분히 의도된 ‘바지세우기’ 전략에 의한 것인지를 예의주시하는 것도 경매법정에서 느끼는 묘미중 하나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