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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 편지

Mr. Han 2008. 11. 30. 12:31



KAL 858기 폭파사건의 범인으로 알려진 김현희가 최근 입을 열었다. 북한 민주화포럼 이동복 상임대표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이다. 그 편지를 <조갑제닷컴>이 공개했다.


그동안 김현희가 이 사건의 진짜 범인인가를 둘러싸고 적지않은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희생자 유족들의 진상규명 요구는 사건 21년째를 맞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김현희는 당시 안기부 요원과 결혼한 뒤 김대중 정부 집권과 함께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 시절에 진행된 진상규명 작업에 협조하지 않았다. 김현희는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의 조사를 끝내 거부했고, 과거사위는 결국 김현희에 대한 직접 면담조차 못하고 조사를 마무리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정권이 바뀐 뒤 다시 등장한 김현희가 보낸 편지의 내용은 관심을 끌만하다.




편지를 보고 생긴 몇가지 의문



나도 관심을 갖고 그가 보낸 편지를 다 읽어보았다. 처음에는 편지라고 해서 자신의 심경같은 것은 담은 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말이 편지이지 잘 정리된 한편의 보고서였다.


우선 양이 방대했다. A4 용지로 25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이었다. KAL기 사건을 '조작음모'로 몰고갔던 방송사들, 그리고 참여정부 시절의 국정원에 대한 항변이었다. 자신이 그동안 이들로부터 겪어왔던 일들을 소개하며 강한 항의표시를 했다.


그런데 김현희의 글은 놀랄만큼 논리정연하고 잘 다듬어져 있었다. 표현과 상황설명, 그리고 논리전개에 이르기까지 아주 잘 훈련된 글이었다. 나도 글 쓰는 일을 계속하고 있기에 잘 알지만, 이 정도 수준의 장문의 글을 논리적으로 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김현희가 공작원이 되기 이전에 글에 대한 훈련까지 얼마나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지난 20년간 가정 속에서 은둔의 생활을 해왔는데 이 정도로 정제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의 편지를 읽는 도중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과연 이 방대하고 치밀한 글을 김현희가 직접 쓴 것이 맞을까 하는 것이었다.


마침 이번 편지에 나타난 김현희의 필적이 1987년에 공개된 자필 진술서의 필적과 다르다는 몇몇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 필적은 세월이 지나면 바뀔 수 있다는 정부관계자의 말도 보도되었다. 나야 필적 전문가가 아니니까 사람의 필적이 세월에 따라 얼마나 바뀌는지 잘 모르지만, 이래저래 이 편지가 김현희가 직접 쓴 것이 맞는가 하는 의문은 남는다.



'반미친북세력'을 비난하는 김현희



그리고 눈길을 끄는 것은 보수진영의 시각과 동일한 김현희의 주장들이었다.


"국정원이 KAL기 조작의혹 사태를 기획 공작하고 음모를 꾸민 배경에는 참여정부의 정치이념과 연관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KAL기 사건이 발생한 후, 이 사건으로 미국이 북한에 테러지원국을 지정하자,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더욱 고립화되었고 남한 내 반미친북세력에게는 테러만행규탄 시위 속에서 큰 타격을 받았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어느 때보다 반미·친북의 색채가 짙은 참여정부가 들어서자 상황이 역전되어 그들의 정치적 반대 세력인 친미·반북세력을 몰아내고 자신의 정치동조 세력들을 활성화하면서 북한 정권과는 서로 친숙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들 집권 세력은 자신들이 민주화세력임을 자처하면서도, 반민주화 세력으로 간주한 군사정권에 대해서는 피해의식과 증오심이 높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들이 군사정권을 포함한 과거 기득권층을 반민족·반민중 세력 내지는 친미·반북세력으로 규정하는 성급함에서 그들이 급진적 이념주의자들이고 편협한 민족주의자들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노무현 정부를 반미.친북 정부로 규정하고 KAL기 사건 진상규명 요구를 반미친북세력의 움직임 속에서 파악하는 김현희의 편지를 접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북한에서 공작원 교육을 받고 KAL기 폭파 사건 이후에는 은둔생활을 했던 그가 어떻게 이렇게 강한 정치적.이념적 주장을 갖게 되었을까.


KAL기를 폭파하여 115명의 생명을 앗아갔다는 김현희가 어떻게 한국사회 극우세력의 인식과 주장을 그대로 갖게 되었는지 그것도 궁금하고 의문이 생기는 거리이다.



범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편지 쓸 수 있나



김현희가 밝힌 내용들, 즉 참여정부 시절 방송사들과 국정원이 자신에게 진술번복을 강요했다는 주장에 대해 국정원 관계자는 과장된 내용이라고 밝힌 것으로 보도되었다. 편지에서 주장한 내용들이 어디까지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따로 검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다만 김현희가 115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폭파범이 맞다면 어떻게 이런 식으로 자신의 불만을 터뜨릴 수 있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설혹 진상조사 요구가 마음에 들지않고 그로 인해 불편한 과정이 있은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 일이 어떤 일인데 유족과 여러 기관들이 진행해온 진상규명 노력을 반미친북세력의 활동인 것처럼 매도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김현희가 정말로 폭파범이 맞다면 설혹 불편함이 있다해도 머리를 숙이고 여전히 참회하는 자세로 자신이 하고싶은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저는 지난 정부에서 발생한 KAL기 사건 관련 조작 음모와 과거사위들의 재조사 활동은 한마디로 ‘김현희와 안기부 죽이기’ 공연이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역사는 이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반드시 응징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고한 많은 생명을 앗아간 항공기 테러사건을 국가기관과 공영방송 기관들이 정치적으로 악용한 것에 대해 그들은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김현희의 편지를 읽다보면 도대체 누가 가해자였고 누가 피해자였는지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다가 진상규명 작업을 해 온 사람들이 김현희의 준엄한 꾸지람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최근 희생자 21주기 모임에 참석한 유족들은 김현희의 편지에 대해 분개했다고 한다.


김현희 개인의 생활이 보호받아야 한다는 점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그에게도 보호받아야 할 생활은 있다. 다만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기에 앞서 그에게도 기본적인 책임은 따른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번 편지에도 불구하고 여러 의문은 계속 따른다. 아니, 편지 자체에 대한 의문이 새로 생겨난다. 그동안 사라졌던 김현희가 이제 정권이 바뀐 이후 다시 나타나 이런 편지를 세상에 내놓은 배경은 무엇일까, 이 편지는 김현희 본인이 쓴 것이 정말 맞는 것인가, 편지에 담긴 주장들은 김현희의 주장이 맞는가.......


편지가 논란과 의혹을 잠재우지는 못하고 있다. 그가 폭파범임이 분명하다면 결국 진상규명작업에 협조하는 것이 논란을 매듭짓는 지름길이었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다. 마침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김현희가 조사에 응하지않으면 동행명령장을 발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아직은 기회가 남아있다. 김현희는 이런 식으로 편지를 통해 진상규명 작업을 비난 할 것이 아니라, 직접 증언을 통해 자신의 말을 자신의 입으로 하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