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해독-담담당당]인지부조화?
[암호해독-담담당당]인지부조화?
첫째, 저항과 권력. 이 문제는 앞서 권력개념을 다루면서 언급한 명제들, 즉 "권력은 아래로부터 나온다" "권력은 긍정적이다" "권력은 생산적이다"라는 명제에 의해 야기된다. 권력이 아래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면 대체 저항은 어떻게 가능한가? 또 권력자 없이 권력이 행사되며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대립을 제거한다면, 대체 누가 누구에게 저항하는 것인가?
권력이 '아래'로부터 나온다고 할 때, '아래'는 피지배자 내지 피지배적 위치도, 아래에 있는 자도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행사되는 배치의 아래, 그리하여 권력의 신경이 작동하는 배치의 말단이며, 그 대상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부딪치는 하부다. 그것은 권력의 도식이 담론이나 제도를 통해 대상에 작용하는 지점이며, 권력이 '실행'된다고 할 때, 실행이란 말이 직접적인 의미를 갖는 수준이다. 아이의 행동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부모, 그들을 그렇게 관계짓는 교육적 관계에 의해 권력은 실행된다. 미시적인 동작 하나하나까지 규범화된 통제의 도식에 따라 움직이도록 강제되는 분업화된 노동자의 수족 사이에서, 그들의 맞물린 작업에 의해 권력은 실행된다. 나사를 늦게 돌리는 채플린은 바로 옆의 망치든 노동자가 닥달하는 데 따라 좀 더 빠르게 나사를 조여대야 한다. 행동 하나하나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권력은 실행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푸코가 보기에 권력에 대한 저항은 권력이 행사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할 수 있는 셈이다. 작업거부나 태업, 출근거부나 취업거부, 담배피우는 아니, 몰래 자위하는 아이, 혹은 가출하는 아이 등등. 그것은 특정한 행동을 정의하고 강제하며 감시하는 권력의 도식에서 이탈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것은 지배자에 저항한다기 보다는 권력의 도식에 저항한다. 따라서 권력은 아래로부터 나온다는 명제가 저항의 가능성을 봉쇄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차라리 권력의 도식에 다라 움직이는 사람들의 관계가 집합적인(mole적인) 적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데 있다.
- 이진경, <철학의 외부> 중에서
<시대전쟁 제43화> 인지부조화 정치 속의 경제와 사회, 시대 이야기
연재를 거의 마칠 때가 되어 갑니다. 길게 오는 동안 보신 것도 못보신 것도 있을 겁니다만, 여하튼 문제를 보는 초점은 매우 간단합니다. <본질을 서늘하게 보라!>는 것이 나의 주문일 것입니다. 거기에는 지나친 감성보다는 그리 봐야만 보인다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지요. 보지 못하셨다면 보시도록 노력하시거나 내팽겨치십시오. 이것은 중간이 없는 'All or Nothing' 게임 룰에 들어간 상태기 때문입니다.
중립도 없고, 적당히도 없어.
니편 아님 내 편이고, 깡그리 싸그리야.
그래서 사회도 1%, 4%, 5%, 90%의 룰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고...구분도 과거 전제군주 시대의 그것과 흡사한 군주와 신하, 그리고 신하의 사병과 백성이 있는...그런 틀과 계급적 구도가 형성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식의 도식화를 즐겨하지 않지만...나타나는 현상만으로 본다면...이 구분법은 과히 틀리지는 않는 모습을 대체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여기는 일방적인 '지시와 복종'이라는 구도가 나타나고, 또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이 되는 듯도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이것을 일정한 인지부조화 상태에 접어 들었다라고 정의내리는 것입니다. 즉, 경제의 경우에서도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만 원하는 정책이 시행된다는 비평은 그렇게 해서 내려지는 것이고...국민의 소리나 소통에 대한 평가와 수납의 공간도 그렇게 제한적인 범주 속으로 들어가는 중입니다.
중세시대 스타일로 가고 있어. 아니 이미 그래. 미네르바 말 마따나.
곡괭이 대신 키보드 들고 있는 거야.
그 이유로 제시되는 것은 아이러니컬 하게도 가장 민주적이라고 부르는 '선거'의 형식입니다. 선거가 끝났다는 것으로부터, 그에 따른 권한을 위임받은 대의민주주의가 작동을 합니다. 그래서 '팔로우 미!'라는 기제가 움직이지요. 그 다음은? 없습니다. 정치 무용론이 나올 정도로 정치계가 죽어버리고...그리고는 이상한 '정치세력'이 홍위병처럼 등장한 상태에서 정치를 논할 가치조차 느끼지 않는다는 비판도 나옵니다. 사실이 그렇다고 보여지지요. 좀 용어를 이렇게 평가해서 그렇지 그냥 솔직히 말씀드리면...이건 완전히 '믿어라!'하는 한 단어에 국한시키는 인지부조화의 강요 국면도 있다고 봅니다.
선거가 민주적이라고?
근대 왜? 이따위 상황이 벌어지는 거야?
돈없으면 선거 안되. 근대 민주적?
민주적이 아니라 자본적 아냐?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안 좋아집니다. 지금 사실상 좋은 것은 어디에서 찾아볼 공간이 없습니다. 정치나 경제, 사회 어디에서건 일정 수준의 잘된 것과 잘못된 것을 논할 여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지요. 대개 모두 나쁩니다.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 그들 소수의 경우도 자신들이 선택하는 공간보다는 선택당하거나 혹은 협의나 담합의 구도가 형성되어 있지요. 이것은 경제를 살린다는 구도보다는 경제가 죽었으니 함께 살리자는 구호성의 입장에 해당합니다. 연초와는 입장이 전혀 달라져 있지요.
중소기업이 어렵습니다. 대기업들 가운데서도 자금난에 허덕이지요. 건설사는 더합니다. 부동산이 개판이 된 상태에서 대주단에 가입해야 하느니 마느니 논란은 진행 중입니다. 구조조정이라는 말은 기업에 해당되지만, 정부는 이에 손을 대려면 산업적 조정을 해야 하는데...부동산 경기부양책이란 것을 내놓은 상태에서 일단 건설이란 항목 자체를 살리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들어가다보니 전혀 경제논리와는 맞지가 않습니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공간에서는 솔직히 여러 '협잡'들이 들어갈 공간이 생기지요. 그것도 아마 '세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일 겁니다. 그러니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는 이 세력 속에 있는가 없는가를 가만 따져서 없다면, 이러한 논란은 남의 일이 되는 겁니다.
사심이 있으니 정책이 안먹혀.
부동산을 포기 못해, 왜? 그게 자기들 펀더멘탈 기반이야.
문제는 자유의지인데...지금 정부가 꺼낸 정책의 원천에서 심각한 변수들이 등장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국제경제의 위기를 말하지만...이건 원래 연초부터 꾸준히 대응해야할 과제로 인지되었던 부분이고...그 대책이 고환율정책이었다는 사실에서...왜? 라는 이유를 묻고, 그것이 아니었다는 답변이 나오고 난 이후는 할 말이 없어진 겁니다. 고환율정책을 편 사람이 고환율정책이 아니었다고 해버리면...대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지요. 그러니 잘못을 따질 공간도 우기기 국면에서는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니 불만족한 비판이 비난으로까지 연결됩니다.
국제 위기 탓 하지마, 그 많던 달라 잘 관리 했음, 이런 상황 안나와.
대외정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달러 스왑을 둘러싸고 재경부와 한국은행 간의 싸움이 볼썽 사나왔던 것처럼 지금 앞으로 벌어질 경제정책의 집행에서 과연 정책의 순차성이 확보되는가 아닌가는 이미 부정적 견해가 더 지배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자화자찬의 목소리가 더 큽니다. 전혀 제어되지 않는 '노래하는 기계'처럼 말입니다. 내게는 사실 그렇게 보입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문제가 있다면 근원적인 치료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관건은 지금 이렇게 흘러가는 방향에서 정치가 경제를 드라이빙하는 국면이긴 하지만, 이것이 정치계가 아닌 정치세력이라고 본다면...그렇다면 거기서 변화가 있어야만 치료의 개시가 가능해지는 겁니다. 그걸 살펴보면, 대체로 도식상으로는 이런 구도가 나옵니다.
첫째, 일단 강.만.수 장관이 물러나고 다른 팀이 경제를 맡아야만 합니다. 그것도 하루 빨리. 내년이면 늦다고 봅니다. 이걸 부정하거나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이건 지금과 같은...그러니까 실패의 반복이며...실패 자체를 거듭하겠다는 선언과도 같은 것이 됩니다. 여기서도 우기기가 등장한다면? 그건 도저히 한국이란 사회 국가에 정치도 없고 지식인도, 지성인도 없는 땅이라는 정의를 내릴 수밖에 없지요. 물론 서로 간의 사적 이익이 많이도 걸리긴 하겠지만...이것은 현상이고 해답이라는 점에서 변화될 바가 없습니다.
일단 강만수를 밀어내라.
둘째, 정치세력이 아닌 정치계가 온당한 모습으로 안정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나.라.당도 마찬가지지만, 그 내부적인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특단의 노력이나 대책이 나오는 것보다는 대책이나 봉합이 주류를 이루지요. 이것이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당 내의 세력이건 그 속에 있는 소위 각성한 지식인이건 간에...이건 어떤 정치적인 이익을 고려하기 보다는 지금의 상황에서 자신들의 목소리가 정치적인 역량으로 드러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야당의 경우는? 솔직히 모두 실망했지만...그래도 목소리는 합쳐서 낼 수 있는 기본요소를 찾아야만 할 때가 아닌가 보지요. 그러나 이걸 찾는다, 못찾는다가 변수가 아니라...못 찾게 될 때는 그만한 정치적 손실은 감당할 수 있어야 하지요. 그러나 한국의 정치가 여전히 정말이지 이런 부분에서는 '자각'이 없는 '몰지각'이 이어진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다음 시대를 살 사람들에게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정치 똑바로 해라.
셋째, 각자 위치에서의 견지입니다. 국민의 본분도 있지요. 여기서 많이들 실망을 하지만, 결국 이것을 만든 사람들도 우리 자신이고 보면, 실망보다는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한다는 결론 밖에는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이건 저항도 아니며, 그렇다고 국가위해를 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철저하게 시대를 지킨다는 것이 기본이 되는 것이지요.
방관하지 말라.
지금은 어떤 방법이 있느냐고 묻는 것보다, 혹은 간단하게 말해서 어떤 양반이 반 년동안만 경제에서 손을 떼라고 하는 바람에 미운털이 박힌 것을 보면서도...가장 현실성이 있는 방안을 제기하고, 또 거기에 패배주의를 가지지 않는 서늘한 눈들이 많아지는 것...그렇게 기록하고...또 ...기록하고...공(功)보다는 과(過)를 철저하게 기록하고 기록해둠으로써 적어도 이런 실수는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당위를 재확인하는 것,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방해나가는 것 이외는 한 사회가 견딜 재간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겁니다. 그래서 지식과 지성이라는 이름으로...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정확하고 납득이 가능한 이야기의 여유공간을 더 확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니, 보잘 것 없는 민초 한 사람이 그냥 날카롭게 현상과 개념이란 비수를 들이대면서 지적하는 것일 뿐입니다.
명박이는 좀 경제에서 손을 떼라.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인지부조화는 극복되어야 할 정신병리학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니 깨어나지 않고서는 해답이 없지요. 자신이 그 속에 있거나 혹은 있지도 않는 데 거기 머무는 척 하는 사람들은 제발이지 이제 그만두는 게 좋습니다. 여기 인터넷 공간 속에서도...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은 없지만...스스로 '알바'라는 형식으로...그건 이론도 아니며..솔직하게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닌 것을...그냥 되뇌이기만 하는 일을 계속하면, 그 또한 습관이 되어 자신의 한 인생의 밝은 빛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보다 건전한 토의가 이루어져야 하고, 그런 공간으로 이곳이 남을 수 있기를. 여기가 아닌 다른 공간에서도 그러한 것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시대가 가지는 힘의 원천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이건 어느 한 민초의 오체를 모두 가시 덩쿨 위에 엎드려 비는 간절한 부탁이라고 해도 좋을 겁니다.
인지 부조화: 착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