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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해독-담담당당]낙관과 비관

Mr. Han 2008. 11. 25. 16:50

[암호해독-담담당당]낙관과 비관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된다. 똑같은 개념을 지닌 말을 가지고도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것은 서로가 말 뒤에 숨은 뜻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들이 아가의 서투른 말을 이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말소리보다 뜻에 귀기울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랑은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

사실 침묵을 배경으로 삼지 않는 말은 소음이나 다를 게 없다. 생각없이 불쑥불쑥 함부로 내뱉는 말을 주워 보면 우리는 말과 소음의 한계를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의 입에서 토해지는 말씨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꾸만 거칠고 천박하고 야비해져 가는 현상은 그만큼 내면이 헐벗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안으로 침묵의 조명을 받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법정 스님, <무소유> 중에서

 

<시대전쟁 제41화> 일희일비 아니다!; 낙관론, 비관론에 대하여

 

법정 스님의 다음 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따라서 성급한 현대인들은 자기 언어를 쓸 줄 모른다. 정치 권력자들이, 텔런트들이, 가수가, 코미디언이 토해낸 말을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대로 주워서 흉내내고 있다. 그래서 골이 비어간다. 자기 사유마저 빼앗기고 있다."

 너의 뇌를 쓸 만한 것들로 채워라.

쓸대 없는 것들로 채우지 말고.

 

'무소유'란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공동소유'다는 해석(윤구병 선생, 변산공동체)은 탁월합니다. 세상에 태어났는 데 어찌 소유(所有)가 없겠습니까. 그런데 이 소유에 대한 집착은 바로 공동으로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끼리만 가지겠다>는 욕망으로 해석되는 겁니다. 이건 경제도 정치도 뭣도 아닙니다. 한 마디로 <골빈 인생>인 겁니다. 그게 보편화되어 가는 과정에서...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오는 이른바 <천황주의자>들의 발걸음 소리만 따박따박 들리는 시간입니다.

정신 못차리고 한눈 파는 사이에, 도둑이 담을 넘는다.

 

나에게 있어 이 시간은 <국민주권시대>가 아닌 방향으로 가고 있고, 국민 대다수의 <노예화 프로그램>이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만 비춰집니다. 실물경제의 메인 스트리트 흐름을 알으켜 주는 많은 고수들이 있지만...정작 인터넷이란 공간 밖에서는 이것을 지적하고 직시(直視)한 눈을 빌려주는 사람이 너무 적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히려 난데없이 어디에서 나타난 지도 모르는 뿌리없는 논리들이 횡행하는 것을 보며, 또 그것을 누군가 자꾸 떠받치고 있는 형상을 보면서 마음 속의 침묵만 더 키우고 있는 셈이지요.

국민주권이 아니고 경제주권의 시대다.

짱이 입 아프게 이야기한 경제권력의 시대가 바로 지금이란 말이다.

 

대저 한 국가라는 것은 정말이지 '사활(死活)을 걸어야 하는' 순간이 있게 마련입니다. 바로 '자주권'입니다. 그래서 나는 일제 강점 이후 대한민국이 태어나긴 했으나 우리는 여전히 독립하지 못했구나 하고 탄식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마저도 사람들에게는 사활을 걸 일이 아니게 느껴진다면, 그건 국가도 사회도 정신을 잃어 버렸다고 보는 것이지요. "펼쳐보아도 한 글자도 없지만, 환한 빛이 나는" 책 한 권은 우리 손에 들려 있지 않다고 봐야 하는 것이지요. 그럼 이 역사가, 시대가 그저 지워지고 맙니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사활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다.

타이밍 놓치면 끝이다.

 

하루 기쁘고 또 슬프고 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감세정책이 나오고 나서 어느 누가 분기찬 모습으로 '그것은 1987헌법의 정신을 위배한 것이다' 고 쓴 글을 읽으면서...아! 20년 전에 있었던 그 논쟁이 다시 부활하는구나 라고 느끼게 되지요. 부자용 정책, 재벌 키우기 정책, 줄세우기, 나아가서 그저 이편 저편 하면서 '편먹기', '편가르기', 부동산 경기부양책이란 수단으로 투기도 조장되는 현실...그것이 경기부양에 정말 어떤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그저 '끼리'의 판단 속에서만 진행되고...결국 국민들이 느끼는 참담함은 어디 오갈 데 없어서 인터넷으로 몰립니다. 그 와중에 기존 언론이 이야기 하지 않은 이야기를 꺼낸 어떤 이는 무슨 선동이니 혹은 그런 유언비어 취급을 당하기도 합니다.

 

신문의 만평은 여러 이야기를 합니다. 굳이 서로 대화하지 않아도 그 내용만으로도 그 사람의 수백 수천마디 언어가 오가지요. 공감하지 않으면 눈길이 절로 딴 곳으로 갑니다. 소통(疎通)이란 바로 '트인 상태에서 통하는' 것이지만...그것이 더 꽉 막히게 된다면...그리고 들어도 못들은 채 하는 것이 이어진다면...그건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목적>이 있다로 해석되는 것이 타당한 겁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드러난 바로는 일단 <편>이라는 것인데...그것은 국가로써는 전혀 온당하지 않거니와 나아가 지금의 사활이 걸린 일을 대하는 태도로써도 합당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소통이란 진심이 있어야 통하는 것이다.

옹알대는 아기 말을 알아듣는 엄마처럼. 

 

예전 일제시대를 겪은 어른들의 말씀에 일본인들 혹은 일본에 붙었던 관료들 집단이 하는 말을 듣고 했던 말에는 "구찌다께"(주둥이뿐)이라는 욕이 있었던 걸로 압니다. 올바른 정책이 아니라 그저 매일 코미디처럼 그 시간만 모면하는 '대책'만 늘어놓을 때, 그리고 그마저도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허황한 '말만 그득한' 형국으로 만들 때, 사용했던 쌍욕입니다. 그 말도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하다가도 이제 자주 되풀이 되면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그건 '소음'이 되지요.

구찌다께(주둥이뿐) 말만 번드르르 하게 했단다. 식민지 앞잡이들도. 

 

낙관론도 배경이 있고, 비관론도 그러합니다만...형세를 소중히 다루는 사람에게 있어 오늘은 "도대체 희망이 어디 있는가"라고 울부짖는 시대입니다. 그러니 말의 성찬은 혼잣만의 이야기일 뿐, 그건 속삭임도 아니요, 다정함도 아닙니다. 그저 소음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그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나오는 방식이 '널뛰기' 즉, 이현령비현령입니다. 여기 붙이고 이것, 저기 붙이고 저것 하는 식이지요. 불리는 이름대로 불린다는 점에서 나름 '철학적'입니다만, 기준이 없으면...그건 그냥 우기기밖에는 안되는 겁니다. "그냥 왼쪽이다하고, 그러면서 오른쪽으로 가자. 놓고나서 중간하면 된다"는 식이 되지요. 그 기준을 정하는 사람이 지금은 말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또한 소통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그 부족된 바는 절대 말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말장난 그만 하고 진심을 보여줘. 그것이 없이는 신뢰도 없다.

이 쪽바리 앞잡이들아.

 

어쩌면 지금 벌써 이것을 고치는 것이 늦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된 것 같으니. 그러나 시대란 항상 전혀 다른 측면에서 그 행위자를 압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런 의지없이 끌려가지는 않는다는 의미지요. 우리의 역사가 그걸 말해줍니다. 나는 우리 사회에 깊숙하게 들어온 '친일'의 이야기를 하지만...사실은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입니다. 그들의 과거가 어떠했고...흔히 일제 강점기의 일본을 말하지만...나는 그 이후...이들이 어떻게 오늘 우리 곁으로 다시 등장하려고 하는 지에 대한 말을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이전 시대와 내가 살아가는 시대의 정합성입니다. 항상 그 씨앗이 있어 지금 키우려는 자가 있다는 것이지요.

지금은 보이지 않는 전쟁이다. 요즘 전쟁은 이런 방식으로 한다.

키보드를 총 대신 잡고, 적을 무찌르는 키보드 워리어의 시대인 것이다.

 

경제를 탐색하는 사람들에게 오늘은 어떤 이론으로도 설명하기 불가능합니다. 어떤 <모델>로 이것이 설명되나요? 어떤 <이론>으로 상황이 정확하게 딱 떨어지게 보이나요? 없습니다. 정치가 강하게 경제를 드라이빙 합니다. 그 속에는 앞서 이야기한 의도성이 옅보이지요. 그것이 옳지 않은 길이라는 겁니다. 그 길은 결코 시대를 독립적이고 안온하며, 온당하게 흘러가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도하는 상대의 이야기도 물론 있지요. 그러나 그들에게는 따질 바가 지금은 없습니다. 그냥 부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일정 수준 이상이라면...그 또한 할 말이 생기겠지요. 지금은 이 시대에, 이 땅에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불편한 지성은 되기 싫은 마음에서 그리 하는 겁니다.

경제이론만 가지고 이 상황을 보면 답이 안나온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누군가가 이 상황을 설계하고, 시나리오를 만들고, 극본과 콘티를 짜고, 스텝을 모집하고, 자본을 대서 제작을 한 것이다.

우연이 어딧냐?  

 

그래서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습니다. 단지 서늘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을 뿐....그러므로 일정한 선은 늘 존재합니다. 기준이 없는 갈등이란 무의미한 것이고, 그런 대립을 통해서 얻어질 것은 별로 많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불러들이지 않아야 하는 일까지 하게 된다면...그것은 시대도 국익도...나아가 이 땅이 존재하는 이유마저도 희미하게 만들 것입니다. 산중에 사는 수도하는 사람들이 산을 말하기를 '향수가 있다'고 하지만...산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도 역사나 시대는 그러한 향수를 짙게 지닙니다. 그것을 빼앗고자 한다면...이도저도 아닌 하나의 선택, 그러니까 절대 기뻐할 수 없고 슬픔만이 있고...낙관은 사라지고...비관만 남게되는 선택의 시간이 오게될 것이지요.

 

오늘 잡설같은 한 마디를 거의 글을 끝맺어가는 무렵, 한 자 적어봅니다. 여전히 시간은 흐르고, 이 시대 또한 흐르지요. 오늘 주식하신 분들, 채권이나 외환 하신 분들, 선물 건드리신 분들...모두 성공하시길 바라고...헷지도 성공하시고...중소기업은 너무 걱정이 되고...특히 절대빈곤층의 숫자가 늘어난다는 소식에 화나고...그런데도 아직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서 살 수 있는 분들은 참 행복하게 보이군요. 그 모든 사람들이 이 시대를 어울렁더울렁 살아가는 시간인 듯 합니다.